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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갈리아의 딸들 -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서평 2020. 2. 26. 21:55
지난 2주 동안, 세 권의 책을 번갈아 가면서 동시에 읽었다.
-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 이갈리아의 딸들
- 조남주 - 82년생 김지영
- 김진아 -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이하, 파이를 구할 뿐)
'같이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읽은 건 아니었고, 꼬북 토론 도서인 '이갈리아의 딸들'은 버스 안에서 또는 집에서, '82년생 김지영'은 회사 도서관에 있길래 점심시간에, '파이를 구할 뿐'은 커피랑도서관에 있길래 공부하기 전에 잠깐, 그냥 책이 있는 장소에서 틈틈이 읽다 보니 모두 읽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3권 모두 페미니즘 도서였고, 세 책을 비교하면서 읽게 되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이 한국 내 성 불평등을 '인지'하는 역할을 했다면, 이갈리아의 딸들은 그것이 '왜' 발생했는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파이를 구할 뿐은 그 다음 단계인, 여성 개인 혹은 연대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워낙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맨, 우먼'이 '움, 맨움'으로 뒤바뀐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했는데, 지금 다시 타인에게 이 책을 소개한다면 정확히 '권력'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싶다. 남녀의 무엇이 아닌 권력이 바뀐 세계에 대한 책이라고.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서, 통쾌함은 전혀 느끼지 못했고, 공감은 많이 했으며, 부러움도 조금 있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굉장히 편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을 공감하는 한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의아한 적도 많았다. "뭐야 이런 것도 차별이라고?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더 평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작가는 남녀의 생물학적인 특성을 바꾸지 않았다. 맨움은 맨처럼 페니스가 있고 수염이 있고, 움은 우먼처럼 유방이 있고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묘사들이 나온다. 가령, 맨움이 움 보다 물리적으로 강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나, 성관계 전 피임약을 먹으면서 임신을 걱정하는 맨움 등 말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물리적인 힘이 세다. 생물학적으로 임신하는 것은 여성이다. 이갈리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갈리아에서는 과거부터 맨움의 페니스를 강제로 잘라 맨움의 힘을 쓰는 것을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행위로 인식시킴으로써, 맨움의 물리적인 힘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한다. 'P-카드'(움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 맨움의 피임약 복용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맨움이 벌을 받는 제도) 제도는 임신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맨움이 더 많이 지게 한다. 이는 나아가, 맨움에게 '관능적인 성행위와 재생산 행위'를 똑같은 문제로 만들어, 성행위 시 맨움을 두렵고 수치스럽고 소극적으로 만든다.
성 차별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차이'에 대한 결과 또는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권력이 누구에게 있느냐, 책임을 누구에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충격적이었다.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특히 생물학적인 것이어서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까지도 사실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임을 보여준다. 그러한 것들로 가장 대표적인 것들인 월경, 임신, 출산조차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사회의 가치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p.381)
2019년 봄, 낙태죄는 66년 만에 폐지 수순을 밟게 되었다. 낙태죄에서 처벌 받는 사람은 '낙태를 한 여성'과 '낙태를 하게 한 사람(의사)' 뿐이다. 낙태죄가 합헌이든 위헌이든, 낙태죄의 맹점은 '임신을 시킨 남성'은 벌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법 조항은 이갈리아의 P-카드 제도와는 반대로, 임신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여성이 더 많이 지게 한다. 하지만 왜 낙태죄 폐지 논란의 중점은, 언제나 남성은 쏙 빠진,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기본권의 충돌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갈리아라는 세계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많이 부러웠던 점 한 가지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것이었다. 피임에 대한 걱정을 덜고 (맨움이 하니깐), 임신을 한다면 충분한 임신 수당과 출산 수당을 받으면서도, 커리어의 단절과 육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정말로 부러웠다.
'맨움 운동은 이제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은 자유의지의 문제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움과 맨움 사이의 신뢰의 문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p.297)맨움 운동에서 처럼, 성 차별로 불리는 많은 문제들이 권력의 문제가 아닌, 자유 의지의 문제 혹은 신뢰의 문제가 될 수 있도록 제도와 인식과 문화가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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